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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벌새(2019) 리뷰 [성장/드라마/가정과 사회]

by 지-잉 2025.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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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 포스터

 

〈벌새〉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14살 소녀 '은희'의 감정과 시선을 정교하게 따라가며, 삶의 사소한 균열과 회복을 조용히 그려낸 영화입니다. 1994년 서울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은희는 학교와 가정, 친구 관계, 사랑과 상실을 동시에 겪으며 혼란과 고립 속에 성장하게 됩니다. 김보라 감독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섬세한 리얼리즘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는 특별한 사건 없이도 얼마나 많은 감정이 오고 가는지를 증명하는 영화적 체험을 제공합니다. 이 영화는 성장을 폭발적인 전환이 아닌, 누적되는 감정의 흔적으로 그려내며 잔잔하지만 강한 여운을 남깁니다.

조용한 파동, 은희의 일상에 깃든 감정들

〈벌새〉는 주인공 은희의 삶을 따라가며, 특별한 사건 없이도 감정이 얼마나 깊고 넓게 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은희는 침묵을 많이 합니다. 가족 안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중심이 아닙니다. 오빠의 폭력, 부모의 무관심, 학교의 규율은 그녀의 감정을 무디게 만들지만, 카메라는 그 ‘무딤’ 속에서도 아주 미세한 떨림을 포착해냅니다.

은희는 친구와 다투고, 남자친구와의 감정도 혼란스럽고, 가족과의 소통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매 순간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꾹 눌러 참습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감정을 과잉되지 않게 표현하면서도 보는 이에게 강하게 전달된다는 사실입니다. 고요한 롱테이크, 과장되지 않은 연기, 일상의 소음이 중심이 되는 사운드는 관객을 영화 속으로 스며들게 합니다.

1994년이라는 시대 설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에게 감정의 앵커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은희의 일상과 직접 연결되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은희의 내면 붕괴를 상징하는 메타포처럼 작동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외적인 사건보다 내적인 파동을 통해 스토리를 이끌어가며, 잊고 있던 감정의 결들을 하나씩 일깨워줍니다.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 존재를 인식받는 순간

은희의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만남은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입니다. 국어 학원에서 만난 영지는 다른 어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은희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았고, 일방적인 조언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은희의 이름을 불러주고, 눈을 맞춰주며, 한 인간으로 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친절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은희에게 처음으로 ‘존재 인식’의 감정을 안겨줍니다.

영지는 대단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책을 추천하고, 편지를 쓰는 등의 소소한 행동을 반복할 뿐입니다. 하지만 은희에게 이 관계는 삶을 바꾸는 ‘사건’으로 남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진심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버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영화는 조용히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영지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병과 이별은 은희에게 또 다른 상실을 안깁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이번 이별 이후의 은희는 더 이상 무너져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누군가로부터 진심 어린 존중을 받았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을 조금씩 지지할 수 있게 됩니다. 성장이라는 것은 단숨에 완성되는 변화가 아니라, 이런 관계의 조각들 속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것임을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록

〈벌새〉는 은희의 개인적 서사로 출발하지만, 동시에 90년대 한국 사회의 정서와 분위기를 섬세하게 기록하는 시대극이기도 합니다. 전화벨 소리, 벽에 붙은 벽지, 골목길의 전봇대, VHS 테이프 같은 사소한 소품들은 당대의 생활 환경을 구체적으로 복원해냅니다. 이러한 디테일은 은희의 감정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며, 관객에게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되는 감정의 지점을 제공하게 됩니다.

카메라는 결코 급하지 않습니다. 빠른 전개나 클라이맥스의 감정 폭발 없이, 은희의 시선 그대로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쌓아 나갑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크게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지만 끝내 울게 만드는 영화”로 기억됩니다.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듯, 한 장면 한 장면이 조용히 감정을 깨우고, 그 울림은 오래갑니다.

감독 김보라는 데뷔작에서 이러한 감정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현해냈습니다.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더욱 진정성이 느껴지며, 은희 역을 맡은 박지후 배우의 절제된 연기 또한 탁월합니다. 무엇보다도 〈벌새〉는 특정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지나온 시절의 감정적 아카이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보편성과 깊이를 동시에 갖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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