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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버닝(2018) 리뷰 [줄거리/인물/총평]

by 지-잉 2025.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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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 포스터

 

이창동 감독의 2018년 작품 〈버닝〉은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국적인 사회 불안과 정체성, 계급 문제, 그리고 청춘의 불확실성을 절묘하게 뒤섞어낸 심리 미스터리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서사나 결말보다 정서적 모호함, 상징성, 그리고 해석의 다층성으로 유명합니다. 주인공들의 대화와 행동 하나하나가 복선처럼 작용하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모호한 경계를 걷습니다. 이 영화는 관객 각자의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강력한 열린 결말 영화이자, 세대와 계층의 벽, 내면의 공허함, 분노, 무기력함이 혼재된 현대 청춘의 초상을 날카롭고도 시적으로 담아냅니다.

줄거리 – 불확실한 진실의 미로

〈버닝〉은 이야기의 실체보다 ‘이야기의 부재’가 더 큰 긴장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시골에서 혼자 살아가며 소설가를 꿈꾸는 청년입니다. 우연히 어릴 적 동네 친구였던 해미(전종서)를 서울 거리에서 만나게 되고, 그녀와의 재회는 종수에게 설렘과 혼란을 동시에 안깁니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며 자신의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종수는 그녀의 방을 오가며 보이지 않는 고양이를 찾아다니는 이상한 일상을 시작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해미는 ‘벤’(스티븐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와 함께 나타납니다. 벤은 잘생기고 부유하며, 종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인물입니다. 종수는 말할 수 없이 불편하고, 불안하며, 벤에 대해 묘한 위협감을 느낍니다. 벤은 종수에게 이상한 고백을 합니다. “나는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

그 순간부터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이후, 그녀가 ‘태워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빠지게 됩니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종수의 시점을 따라갑니다. 해미가 정말 존재했던 것인지, 벤이 어떤 인물인지, 심지어 고양이가 실제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종수의 내면과 현실이 서서히 무너지고, 마침내 영화는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습니다. 하지만 그 결말조차도 사실인지 환상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음으로써, 관객에게 진실의 판단을 유보하게 만듭니다.

인물 – 침묵과 공허, 그리고 불안

종수 (유아인)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무력한 청춘’의 전형입니다. 가난한 집안, 희망 없는 시골의 삶,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위치. 종수는 작가 지망생이지만 글을 쓰지 않고, 사랑을 하면서도 표현하지 않으며, 분노를 품고 있지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끊임없이 요동칩니다. 유아인은 이 내면의 떨림을 섬세한 표정과 절제된 말투로 그려내며, 현대 사회 속 청년의 좌절과 소외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해미 (전종서)
해미는 영화 속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사라지는 사람’이며, 종수에게는 욕망의 대상이자, 무력한 구원의 존재이며, 동시에 현실과 환상을 잇는 경계선 위의 존재입니다. 그녀는 자유롭고 감성적이며, 어떤 진실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해미의 존재는 종수에게도, 관객에게도 영원히 의문으로 남으며, 영화 전체의 불확실성을 견인합니다.

벤 (스티븐 연)
벤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긴장 요소입니다. 겉보기에는 젠틀하고 유쾌하며, 부유하고 감각적인 도시 남자지만, 그 안에는 설명되지 않는 공허함과 기이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벤이 말하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말은 곧 인생의 무의미함을 소각하는 행위처럼 들리며, 그가 말하지 않는 말들이 점점 더 많은 공포를 만들어냅니다. 스티븐 연은 벤의 이중적 미소와 정적인 위협을 탁월하게 소화해내며, 진짜 악인인지, 상상 속 허상인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연기를 펼칩니다.

총평 – ‘태워진 것들’에 대한 은유

〈버닝〉은 답을 주지 않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모호함은 이 시대 청년들의 삶과 감정을 정확하게 반영합니다. 희망도, 확신도, 해답도 없이 공허한 현실을 마주하는 청춘은, 마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고양이’와도 같습니다.

이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나 결말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로 지속적인 긴장과 해석을 만들어냅니다. 비닐하우스는 단순한 소각물이 아니라, 삶의 의미, 사랑, 존재, 관계 같은 것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방식에 대한 은유이자 시각적 상징입니다.

〈버닝〉은 절대 친절하지 않은 영화입니다. 그러나 깊이 있고, 세밀하며, 감각적이며, 철학적입니다. 모든 것이 확실해야 안심할 수 있는 현대 관객에게 ‘불확실함’이라는 감정을 선사하며, 끝없이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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