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본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으로, 2024년 한국에서도 정식 개봉된 화제작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제작에 참여하며 더욱 주목을 받은 이 영화는, 아름답고 고요한 자연 속 마을에 불현듯 침투하는 개발 사업을 통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악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일상적인 대화, 느린 호흡, 뚜렷한 결론 없이도 관객을 끝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특유의 연출력으로, 하마구치 감독은 다시 한번 일상과 윤리를 교차시키는 서사를 선보입니다. 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정말 존재하지 않는가? 영화는 그 질문을 말없이, 그러나 무겁게 관객의 곁에 남깁니다.
줄거리 – 고요한 숲, 그 안에 깃든 균열
일본 나가노현의 작은 시골 마을 '하루사토'는 사람보다 나무가 더 많은,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주인공 다카미츠는 어린 딸 하나와 함께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고, 물은 맑고, 땔감은 스스로 구하고, 도시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자연과 가까운 삶’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도쿄의 한 기획사가 이곳에 ‘글램핑 리조트’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도시에서 파견된 두 명의 직원이 주민 설명회를 열고, 처음엔 부드럽게 소통하려 하지만, 곧 마을 사람들의 반대와 의심이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사업은 오폐수 처리 문제, 생태계 파괴, 지역 문화 훼손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빠르게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 개발 프로젝트가 가져오는 작지만 치명적인 균열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외지인의 침투, 마을 사람들의 분열, 아이의 일상 속 변화 등, 거대한 사건이 없어도 삶의 질서가 어긋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냅니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예상치 못한 전개가 등장하면서, 관객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게 됩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 영화는 절대적인 답을 주지 않고, 무거운 여운만을 남깁니다.
인물 – 평범함 속 진실을 품은 얼굴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캐릭터의 감정 표현이 크지 않고, 오히려 작고 섬세한 말투와 표정 속에서 인물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주인공 다카미츠는 다정하고 조용한 아버지로,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의 말수는 적지만, 딸 하나와의 일상적인 교감, 숲을 대하는 태도,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가 얼마나 깊은 뿌리를 이 마을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개발 기획사에서 파견된 직원들 – 다카히사와 나츠키는 전형적인 외부인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단순히 업무 차 방문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따뜻함과 환경의 매력에 끌리면서 점점 혼란을 겪습니다. 특히 나츠키는 ‘이 사업이 정말 옳은 걸까?’라는 질문 앞에서 인간적인 고민에 빠지며, 대도시의 효율성과 시골의 느린 삶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또한, 어린 딸 하나의 시선도 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아직 세상의 이해관계를 모르지만, 자연에 민감하고 감정에 솔직합니다.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더 순수하지만, 역설적으로 어른들이 놓치는 본질에 가장 가까워 보입니다.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절대적인 악인도, 완전한 선인도 아닙니다. 그들은 시스템 속에서, 또는 생존을 위해, 혹은 무지 속에서 행동할 뿐입니다. 하마구치 감독은 이를 통해 ‘악이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다시 던집니다.
총평 – 악은 없지만, 악처럼 존재하는 것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갈등 구조나 클라이맥스 없이도, 관객을 깊고 묵직한 질문 속으로 밀어 넣는 영화입니다. 무언가 큰 사건이 일어날 듯 하다가도, 그냥 지나가고, 인물들이 감정을 터뜨릴 법한 순간에도 침묵이 흐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관객은 끊임없이 ‘무엇이 악인가’, ‘어디까지가 책임인가’를 자문하게 됩니다.
영화가 택한 방식은 설명보다 관찰, 감정보다 상태, 해결보다 질문입니다. 이런 서사 방식은 빠른 전개에 익숙한 관객에겐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오히려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환경파괴, 무책임한 개발, 공동체 해체 등은 명백한 악처럼 보이지만, 정작 이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악의 자각 없이 움직입니다. 감독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통해, 우리 모두가 그 악에 무심코 동조하고 있는 건 아닌지를 묻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반개발 영화도, 환경 다큐도 아닌, 사유의 영화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악이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어떤 구조가 그것을 눈감게 하는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조용히, 그러나 깊은 질문을 던지고 사라지는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오래 남는 영화로 기억될 것입니다.